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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腸) 속의 8만 번의 대화: 하늘이열리기전날, 붉은 신호(항문출혈)가 건네는 은총
작성자: 우리들항외과 대표원장박철영    작성일: 2026-10-02   조회수: 11   
장(腸) 속의 8만 번의 대화: 개천절 전날, 붉은 신호(항문출혈)가 건네는 은총
대장내시경으로 찾아내는 고약한 함몰형 대장 용종
가을추운바람인지 ,늦더위 끝의 흐림인지, 개천절 하늘이 열리기 전날의 진료실은 유달리 붉은 채도로 물든 하루였습니다.
유독 항문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 환자들이 많이 방문하는날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저의 외래를 찾은 수십여명의 발걸음 중, 항문의 통증과 출혈을 안고 문을 두드린 이들이 무려 십수명 명에 달했습니다. 치열의 찢어지는 고통부터, 혈전성 치핵으로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덩어리의 얇은 점막이 터져 나와 선홍빛 핏덩어리를 쏟아내는 이들까지. 그중에서도 만삭의 임신을 앞둔 젊은 산모의 모습이 눈에 떠오릅니다. 다가올 출산의 환희 속에서, 항문 부위에 밤톨만 하게 돌출된 혈전성 치핵과 출혈로 고통받는 산모의 처연한 얼굴은 진료실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를 진정 깊은 울림으로 채운 것은, 그 바쁜 틈바구니 속에서 마주한 한 통의 가족력이라는 나침반이었다.
스물세 살 청년의 어머니가 올 7월 직장암 3기 진단을 받고 선행 항암화학요법(preop chemotherapy)을 견뎌내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연. 그 어머니를 걱정하며 손자의 손을 이끌고 진료실을 찾은 할아버지의 눈빛에는 깊은 그늘이 서려 있었다. 가족력이라는 무서운 단어가 청년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기에, 내시경을 잡는 내 손길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긴장되고 세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벽을 스캔하던 그 찰나, S결장에서 불현듯 포착된 3밀리미터 남짓한 미세한 병변—전형적인 림프절 전이나 침윤을 의심케 하는 3mm Type 2c(함몰형용종) 양상의 병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드물고도 날카로운 그 2c의 형상을 포착하는 순간, 수십 년 전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1997년 한국의 IMF맞으면서 유달리 눈이 많았던 겨울, 일본 아키타 적십자 병원.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내시경 렌즈 하나에 온 영혼을 집중시키던 그 시절, 나를 가르치던 스승시나이 구도선생님의 목소리가 교실 속 풍경처럼 고스란히 살아났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작은 침묵 속에서 미세한 변화를 읽어내야 한다"던 그분의 엄하고도 따스했던 가르침이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와 오늘 나의 손끝을 이끌었습니다.
다행히 그 미세한 Type 2c (함몰형용종)의심 병변을 안전하게 EMR(내시경적 점막 절제술)로 깔끔하게 절제해 낼 수 있었다.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하겠지만, 검사를 마치고 안도하는 할아버지의 주름진 눈가에 번진 감동의 미소는 진료팀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보람이었습니다.
스물세 살의 청년이 이 거친 대장(腸)속의 용종의 위기를 무사히 건너, 앞으로 펼쳐질 긴 인생을 온전한 건강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마음속 깊이 기도해 봅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개천절을 앞둔 저녁.
오늘 하루도 우리들항외과의 좁은 진료실 안에서 수많은 이들의 아픈 피 흘림과 마주하며, 나는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항문의 붉은 출혈은 단순한 질병의 신호가 아니라, 한 인간의 역사와 가족의 아픔,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묵직하게 교차하는 거대한 우주라는 것을. 그리고 그 우주 속에서 미세한 징후를 놓치지 않도록 스승의 손길로 나를 붙들어 준 시간들에, 이 저녁 조용히 머리를 숙입니다 2026 10 02 박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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